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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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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헨 대성당은 독일 아헨에 위치한 대성당으로, 서기 796년경 샤를마뉴가 건설을 시작하여 805년에 완공되었다. 팔각형 건물(궁정 예배당)을 중심으로 고딕 양식의 성가대석, 측면 예배당, 서쪽 건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샤를마뉴의 묘소이자 936년부터 1531년까지 30명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대관식을 치른 역사적 장소이며, 로타르 십자가, 샤를마뉴 대제의 흉상, 마리엔슈라인 등 중세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아헨 대성당은 서양 건축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7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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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4년의 아헨 대성당
2014년 모습
공식 명칭아헨 대성당
위치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아헨
종교가톨릭
관할 구역아헨 교구
상태활동 중
기능대성당
문화재 지정튀링겐의 문화 기념물
건축
건축 양식오토 양식, 카롤링거-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양식
기공796년
완공805년
길이73m
너비56m
첨탑 수1개
첨탑 높이72m
세계 유산
등재 연도1978년
기준문화 (i, ii, iv, vi)
면적0.2 헥타르
완충 구역67 헥타르
웹사이트
기타 정보

2. 역사

아헨 대성당 애니메이션 (영어 자막)


아헨 대성당은 종종 "황제의 대성당"(Kaiserdom|카이저돔de)으로 불리며[28],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 중 하나이다. 786년경 샤를마뉴가 아헨에 궁정 예배당 건설을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다. 814년 샤를마뉴가 서거하자 그의 유해는 이곳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6], 그의 유해는 13세기부터 "카롤루스 슈라인"(Karlsschrein|카롤루스 슈라인영어)이라는 성유물함에 안치되어 있다.

대성당의 핵심은 샤를마뉴의 궁정 예배당으로, 건설 당시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돔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은 고전주의, 비잔틴, 그리고 게르만-프랑크 왕국 양식이 조화된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아헨 대성당은 936년 오토 1세의 대관식을 시작으로 1531년까지 약 600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30명의 대관식이 거행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165년 샤를마뉴가 성인으로 시성된 후 예배당은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으며[6], 늘어나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355년부터 고딕 건축 양식의 합창단 홀이 추가되었다.[2] 특히 샤를마뉴 서거 600주년인 1414년에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유리 예배당'(카펠라 비트레아)이 봉헌되었다.[6] 이후에도 돔, 여러 예배당, 첨탑 등이 추가되며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성당은 881년 바이킹의 습격, 1656년 아헨 대화재, 1794년 프랑스 혁명군의 점령 등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과 시가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 후 30년 이상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되찾았다.

1978년 아헨 대성당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최초로 등재된 12개 유적 중 하나이자, 독일 최초의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29] 대성당의 아헨 대성당 보물관에는 후기 고전주의, 카롤링거 왕조, 오토 왕조, 슈타우펜 왕조 시대의 귀중한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로타르의 십자가", "샤를마뉴의 흉상", "페르세포네의 석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 보물관은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보물관 중 하나로 꼽힌다.

2. 1. 건립 배경 및 초기 역사

샤를마뉴의 궁정 예배당 평면도


샤를마뉴는 768년부터 아헨에 머물렀으며, 로마 시대 목욕탕이 있던 자리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이 궁전 단지의 일부로 796년경 궁정 예배당 건설을 시작했다.[4] 이 건축은 메츠의 오도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으며, 로마, 라벤나, 트리어, 쾰른 등지의 고대 건물에서 가져온 기둥과 대리석을 사용하여 팔각형 구조물을 세웠다. 건물 외부는 붉은 회반죽으로 마감되었다. 2009년 대성당 수리 중 발견된 목재에 대한 연륜 연대기 분석 결과, 이 중앙 구조물은 늦어도 793년에 시작되어 813년경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25] 798년 알쿠인이 보낸 편지에 따르면 당시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였음을 알 수 있으며, 805년 교황 레오 3세가 완공된 예배당을 봉헌했다.[5]

8세기 말에는 아헨에 주조 공장이 세워져 문, 난간, 말과 곰 동상 등 다양한 청동 조각품 제작에 활용되었다.[16]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하자 그의 유해는 이 예배당 안에 안장되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6] 이후 881년 바이킹의 침공으로 예배당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983년에 복구되었다.

아헨 대성당은 신성 로마 제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936년 오토 1세가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것을 시작으로, 1531년까지 약 600년 동안 30명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장소가 되었다. 997년에는 오토 3세가 예배당 벽에 그림을 그리도록 지시했으며, 1002년 그가 사망하자 유해는 팔각형 건물 안에 안장되었다. 1000년 오토 3세는 샤를마뉴의 묘소를 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때 샤를마뉴의 유해가 잘 보존된 상태로 대리석 왕좌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1002년부터 1014년 사이에는 헨리 2세가 헨리 2세의 강단을 기증했으며, 1152년에서 1190년 사이에는 프리드리히 1세가 바르바롯사 샹들리에를 기증했다.

1165년, 대립 교황 파스칼 3세에 의해 샤를마뉴가 성인으로 시성되면서 예배당은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6] 같은 해 프리드리히 1세는 샤를마뉴의 묘소를 다시 열어 유해를 파리아 대리석으로 조각된 석관에 안치했다.

샤를마뉴의 궁정 예배당은 건설 당시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돔 건축물이었으며, 고전주의, 비잔틴, 그리고 게르만-프랑크 왕국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아헨 대성당은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 중 하나로 여겨진다.

2. 2. 중세 시대



샤를마뉴는 768년부터 800년까지 아헨에 머물며 로마 시대 목욕탕 자리에 궁전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 궁전에는 현재의 아헨 시청과 아헨 대성당이 포함된다. 그는 796년경 메츠의 오도의 설계로 아헨 궁정 예배당 건설을 시작했으며, 이는 늦어도 793년에 시작되어 813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연대는 2009년 대성당 수리 중 발견된 목재에 대한 연륜 연대기 분석을 통해 밝혀졌다.[25] 예배당 건설에는 로마, 라벤나, 트리어, 쾰른 등지의 고대 건물에서 가져온 기둥과 대리석이 사용되었고, 외부는 붉은 회반죽으로 마감되었다. 798년 알쿠인의 편지에 따르면 건설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으며, 805년 교황 레오 3세가 완공된 예배당을 축성했다.[5] 8세기 말에는 아헨에 주조 공장이 세워져 문, 난간, 말과 곰 동상 등 여러 청동 조각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다.[16] 샤를마뉴는 814년 이곳 예배당에 안장되었다.[6]

881년 바이킹의 습격으로 대성당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983년에 복구되었다. 936년에는 오토 1세가 이곳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이후 1531년까지 약 600년간 30명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997년 오토 3세는 팔라티네 예배당 벽에 그림을 그리도록 지시했고, 1000년에는 샤를마뉴의 묘소를 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샤를마뉴의 유해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으며 대리석 옥좌에 황제의 로브를 입고 제관을 쓴 채 앉아 있었다고 한다. 오토 3세는 1002년 팔각형 건물에 묻혔다. 1002년부터 1014년 사이에는 헨리 2세가 헨리 2세의 강단을 기증했다.

1165년 대립 교황 파스칼 3세에 의해 샤를마뉴가 성인으로 추대되면서[6] 예배당은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같은 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는 샤를마뉴의 묘소를 다시 열어 유해를 파리아 대리석으로 조각한 석관에 안치했다. 그는 1152년부터 1190년 사이에 바르바롯사 샹들리에를 기증하기도 했다. 1215년, 프리드리히 2세의 독일 왕 대관식 때 샤를마뉴의 유골은 당시 금속 공예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함인 '카롤루스 슈라인'(Karlsschrein)에 안치되었는데, 프리드리히 2세가 직접 유골을 넣었다고 전해진다.[31][30]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마리아 슈라인'(Marienschrein, 1215년 시작-1237년 완성) 역시 대성당의 중요한 성유물함이다.[32]

늘어나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성당은 여러 차례 확장되었다. 1187년부터 1193년 사이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회랑이 건설되었고, 팔각형 건물이 확장되었다. 1240년경 또는 1250년경에는 팔각형 건물의 박공이 건설되고 서쪽 창문이 무너지면서 외벽이 흰색으로 바뀌었으며, 박공은 다채롭게 칠해졌다. 1355년에는 고딕 건축 양식의 합창단 홀 건설이 시작되었고,[2] 샤를마뉴 서거 600주년인 1414년에는 2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유리 예배당'(카펠라 비트레아)이 축성되었다.[6] 이 시기(1355–1414년)에 성 마태오 예배당도 함께 건설되었다. 약 1350년에는 높은 피라미드 지붕 첨탑과 두 개의 측면 타워를 갖춘 고딕 양식의 서쪽 타워가 추가되었다. 1367년에는 오늘날 헝가리 예배당의 전신인 고딕 양식 예배당이 세워졌다. 1420년경에는 합창단 기둥에 바움베르크 석회암으로 조각상이 만들어졌고, 1429년에는 낸테스의 이중 문이 설치되었다. 이후에도 성 안나 예배당(1449년), 2층 구조의 성 카를 및 성 휴버트 예배당(1456년1474년), 니콜라우스카펠레(1487년 이전) 등이 차례로 추가되었다.

2. 3. 근세와 현대

1487년 이전에 니콜라우스카펠레(성 니콜라스 예배당)가 추가되었으며, 이후 다른 고딕 양식 예배당 건물들도 계획되었으나 건설되지는 않았다.

1656년 아헨 화재로 도시가 광범위하게 파괴되면서 대성당의 전체 지붕도 소실되었다. 1664년에 팔각형 건물과 합창단에 새로운 지붕이 설치되었고, 이때 팔각형 건물 지붕은 현재와 같은 레몬 압착기 모양(Zitronenpresse|치트로넨프레세de)을 갖추게 되었다. 1719년부터 1733년 사이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내부가 개조되었다. 요한 바티스트 아타리(Johann Baptist Atari)가 내부 방에 스투코 장식을 하고 금고를 칠했으며, 주요 창문을 바로크 양식으로 바꾸고 합창단 창문의 트레이서리를 확장했다. 1748년부터 1767년 사이에는 헝가리 예배당이 건설되었는데, 기존 예배당은 구조적 결함으로 1755년 요한 요제프 쿠벤에 의해 철거되고, 요제프 모레티(Joseph Moretti)의 설계에 따라 1756년부터 1767년까지 새로운 건물이 지어졌다. 1788년에는 서쪽 파사드 앞에 입구 현관이 추가되었고, 카롤링거 시대의 청동 문(볼프스튀어, Wolfstür|볼프스튀어de)은 내부로 옮겨졌다.

1794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프랑스 혁명군이 아헨을 점령하면서 대성당은 수난을 겪었다. 기둥 일부가 파리로 옮겨졌고(일부는 여전히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납 지붕은 해체되어 1803년에 슬레이트로 교체되었으며, 대성당 건물이 임시 마구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814년 아헨이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가 된 후, 1832년부터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1843년에는 프랑스에서 반환된 기둥 일부가 재설치되었고, 일부는 새 기둥으로 교체되었으며, 청동 받침대와 자본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1847년에는 대성당 지원을 위한 ''카를스페라인''(샤를마뉴 협회)이 설립되었다.

1900년경의 아헨 대성당


19세기 중후반에는 대대적인 복원 및 개조 작업이 이루어졌다. 1849년부터 1861년까지 합창단과 부속 건물이 수리되었고, 1857년부터 1868년까지 성 안나 예배당, 성 마태오 예배당, 성 카를 및 성 휴버트 예배당이 차례로 복원되었다. 1866년부터 1873년 사이에는 이들 예배당에 고트프리트 굣팅(Gottfried Götting)의 조각상들이 추가되었다. 1869년부터 1873년까지는 바로크 양식 장식과 외부 석고가 제거되었고, 1871년까지 호엔슈타우펜 시대 양식의 박공이 개조되었다. 1879년부터 1884년까지는 서쪽 타워에 고딕 리바이벌 건축 양식이 적용되었으며, 1879년부터 1881년까지 벨기에 건축가 베튄(Béthune)의 설계와 베네치아 모자이크 예술가 안토니오 살비아티(Antonio Salviati)의 작업으로 돔 내부가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1896년부터 1902년까지는 하노버 출신 화가 헤르만 샤퍼(Hermann Schaper)의 설계에 따라 통로에 대리석 클래딩과 모자이크 장식이 추가되었다. 1913년에는 팔각형 건물과 통로에 대리석 바닥이 설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헨은 연합군의 폭격과 포격, 그리고 미국 육군과의 시가지 전투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대성당 역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살아남았다. 전쟁 중 대성당의 많은 예술품들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고, 이동할 수 없는 일부는 교회 내에서 보호 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14세기 합창단 홀의 스테인드글라스, 고딕 리바이벌 양식 제단, 회랑의 상당 부분, 그리고 성스러움 예배당(Heiligtumskapelle|하일릭툼스카펠레de)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 전쟁 후 재건 및 복원은 30년 이상 간헐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추정 비용은 약 4000만유로에 달했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는 파괴된 합창단 창문이 발터 베너(Walter Benner)와 안톤 벤들링(Anton Wendling)에 의해 복원되었다.

2000년, 독일 연방 공화국은 "아헨 대성당 1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1986년부터 2011년까지 아헨 대성당에 대한 대규모 복원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외부 개조는 2006년에 완료되었고, 내부 및 지하실 개조, 팔각형 건물 모자이크 청소 및 보존 작업은 2011년에 완료되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약 3500만유로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헨 대성당은 종종 "황제의 대성당"(Kaiserdom|카이저돔de)으로 불리며[28],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 중 하나이다. 197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최초로 등재된 12개 유적 중 하나이자, 독일 최초의 세계 유산이 되었다.[29]

대성당의 보물관인 아헨 대성당 보물관은 후기 고전주의, 카롤링거 왕조 시대, 오토 왕조와 슈타우펜 왕조 시대의 중요한 걸작들을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로타르의 십자가", 샤를마뉴의 금으로 만든 "샤를마뉴의 흉상", 그리고 페르세포네가 조각된 로마 시대의 대리석 석관인 "페르세포네의 석관" 등이 있다. 아헨 대성당 보물관은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보물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3. 건축

아헨 대성당 남쪽 모습. 여러 시대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아헨 대성당은 종종 "황제의 대성당"(Kaiserdom|카이저돔de)으로 불리며[28],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 중 하나이다. 786년 카롤루스 대제아헨에 자신의 궁전과 함께 교회를 짓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하자 그는 자신이 세운 이 대성당에 묻혔으며, 그의 유해는 13세기에 만들어진 정교한 성유물함인 Karlsschrein|카롤루스 슈라인de에 안치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30][31]

대성당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카롤루스 대제가 세운 궁정 교회, 즉 팔각형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팔각형 건물은 후대에 덧붙여진 부분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건설 당시에는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돔 구조물이었다. 이 건물은 고전주의, 비잔틴, 그리고 게르만-프랑크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념물이다.

아헨 대성당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936년부터 1531년까지 약 600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30명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이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고딕 건축 시대에는 기존 팔각형 건물 동쪽에 거대한 성가대석이 증축되었다. 약 1000m2에 달하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유명하여 '유리 집'(Glashaus|글라스하우스de)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카롤루스 대제 서거 600주년을 기념하여 봉헌되었다. 이 외에도 팔각형 건물 주변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측면 예배당들이 덧붙여졌다.

1978년 아헨 대성당은 그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최초로 등재된 12개 유적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독일 최초이자 유럽 전체에서도 초기 등재 유산에 속한다.[29][33] 대성당의 보물관에는 후기 고전주의, 카롤링거 왕조, 오토 왕조, 슈타우펜 왕조 시대의 귀중한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보물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로타르 십자가", "카롤루스 대제의 흉상", "페르세포네 석관" 등이 있다.

3. 1. 카롤링거 팔각형 건물 (궁정 예배당)

팔각형 건물의 외부 모습


팔각형 돔 아래에 설치된 바르바로사 샹들리에


대성당의 중심부를 이루는 팔각형 건물은 796년에서 805년 사이에 아헨 궁전의 예배당으로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이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작은 아야 소피아와 같은 동시대 비잔틴 건축 양식을 모델로 삼았다.[9] 건축가는 메츠의 오도였으며, 초기 설계는 16각형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돔 형태의 팔각형 내부 공간이었다.[5] 샤를마뉴가 세운 이 궁정 예배당은 완공 후 200년 이상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높고 큰 건물로 여겨졌다.

궁정 예배당은 2층 구조의 높은 팔각형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 팔각형의 지름은 14.46m이며,[5] 튼튼한 기둥들이 팔각형의 클로이스터 볼트를 지지하며 중앙 공간을 덮고 있다. 이 내부 팔각형 주변에는 낮은 교차 볼트 구조의 16각형 회랑이 있고, 그 위로는 '호흐뮌스터'(Hochmünster, 높은 교회)라 불리는 갤러리가 자리한다. 아래층 아치형 개구부의 높이는 위층 갤러리 개구부의 절반 정도로, 아래층이 더 육중해 보이는 효과를 준다. 두 층은 넓은 처마 장식으로 구분된다. 높은 제단과 황제의 옥좌는 상층 회랑의 팔각형 측면 방에 위치했으며, 이 공간은 각지게 배치된 통 볼트로 덮여 있었다. 또한, 통로를 통해 궁전과 연결되었다.[5] 빛은 3개 층으로 구성된 아치형 창문들을 통해 내부로 들어온다. 팔각형 돔의 모서리는 코린트 양식의 주두가 달린 쌍을 이룬 필라스터를 통해 벽과 연결된다.[5]

상층 갤러리의 개구부는 여러 기둥으로 나뉘어 있다. 이 기둥들은 고대 유물로, 쾰른의 성 게레온 바실리카에서 가져온 것이다. 샤를마뉴는 8세기 말 로마라벤나에서 더 많은 전리품(Spolia)을 아헨으로 옮겨오는 것을 허락했다. 1794년 라인란트를 점령한 프랑스 혁명군이 이 기둥들을 파리로 가져갔으나, 1815년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절반 가량이 아헨으로 반환되었다. 1840년대에 원래 위치로 복원하면서 부족한 기둥은 오덴베르크 화강암으로 만든 새 기둥으로 대체했다. 내부 벽은 본래 대리석 판으로 마감되어 있었다.[8] 팔각형 측벽 상층부의 둥근 아치형 개구부 앞에는 약 1m 높이의 카롤링거 시대 청동 난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 양식을 따라 1200년 전에 단일 주조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원래 쿠폴라 모자이크는 8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 기록에 따르면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24명의 장로가 왕관을 바치는 모습과 함께, 사도들의 상징에 둘러싸인 승리자 그리스도를 묘사했다고 한다. 이 모자이크는 1880년부터 1881년 사이에 벨기에 건축가 장-바티스트 드 베튄의 설계를 바탕으로 베네치아의 안토니오 살비아티 공방에서 복원했다. 돔은 정교한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8]

채석한 돌로 지어진 카롤링거 팔각형 건물의 외부 벽은 이음새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장식이 매우 적다. 유일한 예외는 쿠폴라 기둥 돌출부에 고대 양식의 주두가 장식된 점이다. 카롤링거 시대의 석조 부분 위에는 후기 로마 양식 박공 위에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아치들이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팔각형 건물에는 특이하게 바로크 양식의 환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라인 주 기념물 관리국(Rheinish Office for Monuments)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샤를마뉴 시대에 아헨 대성당은 붉은색으로 칠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붉은색 석고는 으깬 붉은 벽돌을 첨가하여 내구성을 높였으며, 이는 건물의 제국적 위상을 나타내기 위한 색상 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0]

아헨 대성당 건축의 기초가 된 기하학적 원리나 기본 치수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초기 건축가들은 드루시안 피트(약 334mm)나 로마 피트(약 295.7mm)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 단위들만으로는 교회의 실제 치수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11] 2012년 건축사학자 울리케 헤크너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322.4mm 길이의 새로운 단위, 이른바 '카롤링거 피트'를 가정하면 팔각형 건물의 다른 모든 치수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단위는 비슷한 크기의 파리 왕실 피트(약 324.8mm)를 참고하여 '아헨 왕실 피트'(Aachener Königsfuß|아헤너 쾨니히스푸스de)라고 명명되었다.[12]

팔각형 구조에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숫자 8은 여덟째 날(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을 상징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의미한다. 또한 중세 건축 상징주의에서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 10 역시 팔각형 건물 설계에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돔을 둘러싼 회랑을 포함한 팔각형 건물의 전체 지름은 100 카롤링거 피트(10 x 10)이며, 이는 돔의 높이와 같다.[13]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하자 그의 유해는 이 궁정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유해는 13세기에 제작된 정교한 성유물함인 카롤루스 슈라인(Karlsschrein)에 안치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936년부터 1531년까지 약 600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30명의 대관식이 거행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아헨 대성당은 종종 "황제의 대성당"(Kaiserdom|카이저돔de)으로 불린다.[28]

1000년, 오토 3세는 샤를마뉴의 묘소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유해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으며, 대리석 옥좌에 앉아 황제의 로브를 걸치고, 머리에는 제관을 쓰고, 무릎에는 복음서가 펼쳐진 채 손에는 홀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1165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다시 묘소를 열어 유해를 파로스 섬 대리석으로 조각한 석관에 안치했다. 1215년, 프리드리히 2세의 독일 왕 대관식 때, 샤를마뉴의 유골은 당시 최고의 금속 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걸작인 카롤루스 슈라인(Karlsschrein|카를스슈라인de)[30]으로 옮겨졌다. 프리드리히 2세가 직접 유골을 안치했다고 전해진다.[31]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마리아 슈라인(Marienschrein|마리엔슈라인de; 1215년 제작 시작-1237년 완성)[32] 역시 이 교회의 유명한 성유물함이다.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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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서쪽 건물 (Westwork)

아헨 대성당 서쪽에서 본 모습


카롤링거 시대 늑대 문 손잡이


대성당의 서쪽 건물(westwork)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지어졌으며, 양쪽에 두 개의 계단 탑이 있다. 이 건물은 2층 구조이며, 서쪽 끝에는 18세기에 현관이 덧붙여졌다.

현관에 달린 청동 문, 이른바 '볼프튀어'(Wolfstür|볼프스튀어de, 늑대 문)는 총 43 백웨이트의 무게가 나간다. 이 문은 800년경 아헨에서 만들어졌고, 원래는 서쪽 건물과 팔각형 건물 사이에 있었으나 1788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1924년에 복원 작업을 거쳤다.[14] 문의 각 면은 8개의 직사각형 판으로 나뉘어 있다. 숫자 8은 기독교에서 부활의 날이자 완벽함을 나타내는 일요일을 상징하며, 숫자 12와 함께 궁정 예배당 건축 곳곳에 사용된 중요한 숫자이다. 이 사각형 판들은 달걀 모양 장식이 새겨진 띠로 둘러싸여 있다. 달걀은 고대로부터 생명과 다산의 상징이었으며, 기독교에서는 영생이라는 의미까지 더해졌다. 사자 머리 모양의 문고리 주변에는 24개(12의 2배 또는 8의 3배)의 아칸서스 잎 장식이 있는데, 이 숫자 역시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늑대 문의 형태가 고대 로마 사원의 문을 본뜬 것은, 샤를마뉴가 아헨에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궁정 예배당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음을 시사한다.[15]

입구 홀의 청동 솔방울


서쪽 건물 앞뜰에는 여러 청동 조각상이 있었는데,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과 비슷한 기마상도 그중 하나였다.[16] 현재 앞뜰에는 10세기 오토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곰 모양의 청동 조각이 있다.[17] 곰 조각 맞은편에는 청동으로 만든 솔방울 조각이 있다. 표면에 129개의 비늘 모양이 표현되어 있으며,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하여 91cm이다. 제작 시기는 3세기에서 10세기 사이로 추정될 만큼 의견이 분분하다. 솔방울의 받침대는 오토 시대의 것으로 확실시되며,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어 장단 6보격 시구가 새겨져 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솔방울이 원래 분수의 일부였으며, 카롤링거 시대에 궁정 예배당 안뜰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18]

밤에 서남서쪽에서 본 모습


서쪽 건물의 상층부는 섬세하게 쌓은 벽돌 벽이 특징이다. 벽의 안쪽 면은 바깥으로 볼록하고, 바깥 면은 안으로 오목하여, 전체적으로 볼록-오목한 곡면 형태를 띤다. 18세기에 현관이 추가되기 전에는 아래층 나르텍스에서 바라보는 카롤링거 시대 서쪽 정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상층 서쪽 벽의 큰 반원 아치형 개구부(niche)가 아래층 통로 천장의 반원형 궁륭과 조화를 이루었다.

현재 서쪽 벽에는 커다란 서쪽 창문이 나 있다. 이 창틀은 고딕 예술 양식으로, 카롤링거 시대에 있던 더 작은 창문(아마도 중앙 기둥으로 나뉜 이중 아치 형태의 세로대 창)을 대체한 것이다. 현재의 창문은 1956년 에발트 마타레가 디자인했다. 마타레의 디자인은 대성당 내부 카롤링거 시대 청동 문의 구조를 추상화하여 표현한 것이며, 창문은 청동과 가공하지 않은 석영으로 만들어졌다.

서쪽 건물 상층부의 정확한 기능은 확실하지 않다. 오랫동안 성모 마리아 대학교회에 속했던 세례 권한과 관련된 세례반이 '구제도' 말기까지 대리석 왕좌 뒤에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19], 이 상층 공간이 세례 의식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서쪽 벽, 큰 창문 아래에는 오늘날에도 '펜세텔라'(작은 창문)라고 불리는 작은 창이 있어, 아래쪽의 옛 안뜰(아트리움)을 내려다볼 수 있다.[20] 이 방의 북쪽 벽으로는 소위 '카롤링거 통로'가 이어져 궁전 북쪽의 아울라 레기아(왕의 홀)와 교회를 연결했던 것은 분명하다.

서쪽 건물의 아래층에 있는 통 모양의 방은 814년 1월 28일 샤를마뉴가 사망한 후 페르세포네 석관에 안장될 때 그의 무덤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서쪽 건물의 상층 바닥은 14세기 전반과 17세기에 개조되었으며, 양쪽 탑은 1879년부터 1884년 사이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3. 3. 성가대석 (Choir)

1355년부터 1414년까지 마리엔슈티프트와 아헨 시장 게르하르트 코루스(1285–1367)의 주도로 기존 팔각형 건물 동쪽에 고딕 건축 양식의 성가대석이 세워졌다. 이전에는 직사각형 형태의 카롤링거 시대 성가대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새롭게 지어진 고딕 양식 성가대석은 길이 25m, 폭 13m, 높이 32m에 달한다. 외부 벽은 최대한 많은 창문으로 채워졌는데, 유리 면적만 1000m2가 넘어 '글라스하우스'(유리집)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는 아헨의 중요한 성유물들과 샤를마뉴의 유해를 위한 거대한 유리 성유물함처럼 보이도록 의도된 설계였다. 이러한 설계는 중요한 유물을 보관하는 왕실 예배당이었던 파리의 생트 샤펠을 모델로 삼았다. 성가대석의 높은 볼트 구조를 안정적으로 지탱하기 위해 건설 당시부터 철제 봉을 내부에 설치했다. 이는 좁은 석조 기둥에 가해지는 측면의 힘을 분산시키고, 창문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공법이었다.

늘어나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고딕 건축 시대에 이 성가대 홀이 조성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 서거 600주년을 기념하여 봉헌되었다. '유리 집'으로 불리는 이 웅장한 건축물은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아왔다.

성가대석 내부와 관련된 주요 유물 및 시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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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측면 예배당



팔각형 주변에는 여러 개의 측면 예배당이 있다. 동남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다음과 같다.

  • 동남쪽에는 14세기 후반에 지어진 ''마티아스 예배당''(성 마태오 예배당)이 있는데, 이는 옆에 있는 성가대석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 성 마태오 예배당 남쪽에 인접한 곳에는 고딕 양식의 ''안나 예배당''(성 안나 예배당)이 있다. 이 예배당의 하층은 원래 대성당 문 중 하나의 나르텍스였지만, 나중에 문이 봉인되고 방은 예배당으로 바뀌었다.
  • 서쪽 정면의 남쪽에는 헝가리 예배당이 있다. 원래는 고딕 양식의 측면 예배당이었지만, 18세기에 이탈리아 건축가 요제프 모레티의 계획에 따라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 북쪽의 서쪽 정면에 인접한 곳에는 15세기에 지어진 성 니콜라스 & 성 미카엘 예배당이 있으며, 20세기에 요제프 부흐크레머가 만든 바로크 리바이벌 건축 양식의 제단화가 있다. 이전에는 아헨 대성당의 사제들의 매장지였다.
  • 북동쪽에는 샤를마뉴 & 성 후베르투스 예배당이 팔각형 안에 지어졌다.
  • 대성당 단지와 관련된 더 많은 예배당은 수도원(모든 성도와 모든 영혼 예배당)과 대성당 앞마당(세례 예배당)에서 찾을 수 있다.


헝가리 예배당


니콜라우스 예배당(성 니콜라스 예배당)의 성가대석


알레르하이리겐 예배당(모든 성도 예배당)

4. 주요 소장품

아헨 대성당은 예술적, 종교적 의미에서 예외적인 고전 고대, 카롤링거 왕조, 오토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의 중세 예술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4. 1. 카롤루스 대제의 옥좌

아헨 대성당의 하층 서쪽 갤러리, 성가대 반대편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옥좌가 있다. 이 옥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새로운 조사가 이루어졌다. 원래의 카롤링거 왕위는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에서 가져온 spolia에서 유래했다. 옥좌의 외관과 팔라틴 예배당에서의 위치는 수세기에 걸쳐 변하지 않았다. 936년에서 1531년 사이에 31명의 독일 왕이 마리엔알타르(성모 제단)에서 도유식과 대관식을 치른 후 이 옥좌에 올랐다.

4. 2. 마리엔슈라인 (Marienschrein)

마리엔슈라인(성모 마리아의 성해함)은 아헨 대성당의 성가대석에 위치해 있으며 1220년부터 1239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그리스도, 마리아, 카롤루스 대제, 교황 레오 3세, 그리고 열두 사도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성해함에는 아헨의 4대 성유물, 즉 성모 마리아의 외투, 그리스도의 아기 때 요람, 성 세례자 요한의 참수 천,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옷이 보관되어 있다. 1349년에 시작된 관습에 따라 7년마다 성해함에서 성유물을 꺼내 아헨 대 순례 기간 동안 전시한다. 이 순례는 2023년 6월에 가장 최근에 열렸다.

4. 3. 바르바로사 샹들리에

8개의 굽은 면으로 구성된 돔의 천장에는 지름이 4m가 넘고 지면에서 약 4m 높이에 긴 체인으로 매달린 휠 샹들리에가 있다. 이는 바르바로사 샹들리에(1165/1170)로 알려져 있으며,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그의 아내 베아트리스가 기증한 작품이다. 샹들리에의 48개 촛불은 교회의 엄숙한 행사를 위해 켜진다.

4. 4. 보물관

아헨 대성당 보물관은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보물관 중 하나로 여겨진다.[2] 이곳에는 후기 고전주의, 카롤링거 왕조 시대, 오토 왕조와 슈타우펜 왕조 시대의 중요한 걸작들이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로타르 십자가, 샤를마뉴 대제의 흉상, 그리고 페르세포네 석관 등이 있다.

814년 서거한 카롤루스 대제의 유해는 1215년 프리드리히 2세의 대관식 때 맞배지붕 형태의 금세공 유물함인 Karlsschrein|카롤루스 슈라인영어[30]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직접 유골을 납골했다고 전해진다.[31] 이 시기에 함께 제작된 Marienschrein|마리아 슈라인영어(1215년 시작-1237년 완성)[32] 역시 대성당의 중요한 성유물 용기이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7년마다 유물이 특별 전시될 때 이 보물들을 직접 볼 수 있다.[2]

5. 종교적, 역사적 의의

아헨 대성당은 종종 "황제의 대성당"(Kaiserdomde)으로 불리며[28],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축물 중 하나이다. 796년경 샤를마뉴는 궁정 예배당 건설을 시작했으며[4], 이는 805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축성되었다.[5] 814년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가 사망하자 그는 이곳 대성당에 묻혔다.[6]

대성당의 중심인 궁정 예배당은 건설 당시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돔 건축물이었으며, 고전주의, 비잔틴, 그리고 게르만-프랑크 왕국 양식이 조화된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건축적 중요성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아헨 대성당은 936년부터 1531년까지 약 600년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30명의 대관식이 거행된 중요한 장소였으며, 이로 인해 '황제의 대성당'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1165년 샤를마뉴가 성인으로 추대된 이후[6], 대성당은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고, 늘어나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355년에는 고딕 건축 양식의 합창단 홀이 추가되었다.[2]

제2차 세계 대전 중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나, 기본 구조는 보존되었고 전후 30년 이상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1978년에는 그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최초로 등재된 12곳 중 하나이자, 독일 최초의 세계 유산이 되었다.[29] 유네스코는 아헨 대성당이 ▲뛰어난 예술 작품이자 알프스 이북 최초의 아치형 구조물이며(기준 1),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중세 초기 종교 건축의 원형으로서 영향을 미쳤고(기준 2), ▲독특한 궁정 예배당 양식을 보여주며(기준 4), ▲서양 통일과 카롤루스 대제의 정신적·정치적 부흥을 상징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이 열린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기준 6)고 평가했다.[33]

대성당의 보물관에는 후기 고전주의, 카롤링거 왕조, 오토 왕조, 슈타우펜 왕조 시대의 귀중한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로타르의 십자가", "카롤루스 대제의 흉상", "페르세포네의 석관" 등이 있으며, 이는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보물관 중 하나로 꼽힌다.

5. 1. 카롤루스 대제의 묘소

아헨 대성당의 핵심인 카롤링거 시대의 팔각형 건물은 원래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 예배당으로 세워졌으며 그의 묘소이기도 하다. 814년 1월 28일 그가 사망한 후, 그는 이 교회에 묻혔다.[6] 정확한 매장 장소는 문서 부족과 물리적 증거의 모호성으로 인해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팔각형 건물 입구의 서쪽 탑 아래에 있는 페르세포네 석관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1000년, 오토 3세는 카롤루스 대제의 무덤을 열었다. 그와 동행한 궁정 신하 중 한 명인 오토 롬멜로(Otto of Lomello)는 이 사건을 기록했는데, 이 내용은 1026년경에 쓰여진 노발레시아 연대기(Chronicon Novaliciense)에 보고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카알에게 갔다. 그는 다른 죽은 자들처럼 누워 있지 않고 살아있는 듯이 앉아 있었다. 그는 금관을 쓰고 장갑을 낀 손에는 홀을 쥐고 있었다. 손톱이 장갑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 위에는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된 덮개가 있었다. 들어가서 우리는 이것을 부수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강한 냄새가 우리를 덮쳤다. 무릎을 꿇고 우리는 카알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고 피해를 수습했다. 카알 황제는 코끝을 제외하고는 시신이 썩어 없어지지 않았다. 오토 황제는 이 부분을 금으로 대체했고, 카알의 입에서 이빨을 꺼냈으며, 묘실 입구를 막고 다시 물러났다."

1165년, 카롤루스 대제의 시성식에 맞춰, 프리드리히 1세 황제가 다시 무덤을 열고 그의 유해를 파리아 대리석으로 조각한 석관에 넣어 재매장했다. 1215년,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왕 대관식에서 그의 유해를 마지막으로 재매장하여,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이자 성유물함인 카를스슈라인(Karlsschrein)에 안치했으며, 현재까지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30][31] 이 카를스슈라인은 13세기 아헨 지역 공예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오토 3세 황제 또한 아헨 대성당에 묻혔다.

5. 2. 독일 왕들의 대관식 장소

샤를마뉴의 명시적인 지시에 따라 그의 아들 경건왕 루이가 이곳에서 왕위에 올랐다. 936년 오토 1세의 대관식을 시작으로 1531년까지 약 600년 동안, 30명의 독일 군주(신성 로마 황제)가 이곳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대관식 자체는 대성당의 고제단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 왕들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샤를마뉴의 아헨 왕좌에 앉아 즉위식을 치렀다. 이 시기 독일의 통치자들은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더라도 샤를마뉴의 왕좌에 앉는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아헨 대성당은 '황제의 대성당'(Kaiserdomde)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28]

5. 3. 아헨 순례

아헨 순례(Aachener Heiligtumsfahrtde)는 대성당의 가장 중요한 4가지 종교 유물을 신자들이 볼 수 있는 기독교 순례로, 1238년부터 확인된다. 1349년부터 이 유물들은 7년마다 한 번씩 전시되었다. 가장 최근의 순례는 2023년에 열렸으며, "''나를 발견하세요''"라는 모토를 내걸었다.

6. 영향

중세 시대 초부터 아헨 대성당은 에센 대성당, 메틀라흐의 구 타워, 그리고 알자스의 오트마르샤임 수도원 교회와 같이 숭배와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옥타곤과 성가대석의 건축 요소는 2007년 독일 토목 공학의 역사적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

7. 전설

전설에 따르면 아헨 시민들은 아헨 대성당 건축을 완료할 자금이 부족하게 되었다. 남은 자금을 얻기 위해 그들은 대성당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의 영혼을 대가로 악마와 거래를 했다고 한다. 완공 후, 주민들은 늑대를 대성당 안으로 들여보냈고, 악마는 재빨리 그 동물의 영혼을 가져갔다. 속임수를 깨달은 악마는 대성당에서 뛰쳐나가면서 사자머리 문 손잡이에 엄지손가락을 잘랐다. 늑대 조각상이 대성당 입구에 있으며, "악마의 엄지"는 사자 입안에서 느껴볼 수 있다.[26]

참조

[1] 웹사이트 Aachen Cathedral https://whc.unesco.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2022-05-07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웹사이트 The devilish tale behind Aachen Cathedral | the Lady (Pre COVID-19) Travels https://web.archive.[...] 2019-03-06
[27] 서적 世界の聖地バイブル : パワースポット&スピリチュアルスポットのガイド決定版 ガイアブックス、産調出版
[28] 웹사이트 一生に一度は行ってみたい!ヨーロッパの美しい教会7選 https://tabizine.jp/[...] TABIZINE 2018-08-13
[29] 웹사이트 世界遺産第一号のドイツ「アーヘン」温泉保養地だった町で世界遺産を堪能 https://www.oricon.c[...] ORICON NEWS 2018-01-29
[30] 간행물 Gotik Chr.Belser
[31] 간행물 Lexikon der Heiligen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32] 간행물 Deutsche Plastik der Frühzeit Karl Robert Langewiesche Nachfolger Hans Köster
[33] 웹사이트 Aachen Cathedral https://whc.unesco.o[...]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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